다시 성경으로, 레이첼 헬드 에반스 -5

2025. 3. 24. 16:58

p189-191

 

이 영화는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모습을 조심스럽고 절제된 시각으로 잘 그려냈다.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옳고 그 름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는 것이 기사 제목을 붙일 때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평범한 신앙인들의 삶을 반영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필로미나의 기적」은 내가 본 영화 중에서 신앙을 가진 인물과 회의적인 인물 양쪽 모두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흔 치 않은 영화였다. 전적으로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느껴졌기 때 문이다.

이처럼 삶의 복잡성을 과감히 끌어안는 이야기를 만들 때 우리는 성경 속 지혜 문학의 후예가 되어 모든 예술가에게 부 여된 임무, 곧 지시하고 가르치고 포장하는 것이 아닌 진실을 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하고, 또 때로는 놀라운 진실을 말이다. 6천2백만 달러를 벌어들이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명철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행렬 에 동참하게 된다(잠언 9:6).

진실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작품을 쓸 수 있다면 나는 어 떠한 도전도 즐거이 받아들일 것이다. 바라건대, 나의 삶도 그 처럼 진실하기를.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더 많도소이다. ...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17-18, 23-24)

시편 139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 중 하나다. 그런데 나 혼자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말씀이 인쇄된 탁상용 달력이나 머그잔을 어디서나 쉽게 보게 되니 말이다. 교단을 가리지 않고 이 시편은 기도문과 찬양 가사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선택적으로 시편 139편을 인용한다. 다음과 같이 파격적인 문장을 생략 부호로 손쉽게 숨겨 가면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시편 139:19-22)

확실히 안부를 묻는 카드에 인용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니다. 시편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시편에는 위로의 말씀과 찬양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150개의 노래와 시로 이루어진 시편을 찬송가처럼 사용했고, 지금도 많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 시편을 기도문으로 사용한다. 시편 하면 환희와 기쁨의 노래("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가 쉽게 떠오르겠지만, 거기에는 애통함("나는 탄식만 하다가 지치고 말았습니다. 밤마다 짓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내 잠자리를 적십니다.")과 고백("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분노("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던지는 대범한 질문("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이 포함되어 있다. 시편에는 바빌로니아 포로기에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혼란과 침통함이 반영된 시가 많기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애가도 수두룩하다. 하나님께 슬픔을 토로하는 시편 44편이 그 좋은 예다.

 

주님께서 우리를 적에게서 밀려나게 하시니, 우리 를 미워 하는 자 들이 마음껏 우리 를 약탈 하였습니다 . 주님 께서 우리 를 잡아 먹힐 양 처럼 그들 에게 넘겨 주시고 , 여러 나라 에 흩으 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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