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 김훈 : 안준생

2025. 3. 7. 15:35

안준생安俊生, 1907~1952

 

 

안준생은 안중근의 차남이다. 1907년 안중근이 집을 떠날 때 안준생은 어머니 김아려의 몸속에서 육 개월 된 태아였고 아버지 안중근이 처형될 때는 약 삼십 개월 된 아기였다. 안준생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안중근도 차남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안중근의 거사 후 안준생은 유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 극동 지역과 북만주 일대를 옮겨다니며 자랐고, 1919년 이후에는 상해에 자리잡았다.

1939년 가을에 안준생은 한국에 왔다. 안준생의 한국 일정은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松澤龍雄와 촉탁 아이바 기요시相場淸가 동행하면서 안내했고 소노키 스에키園木末音가 통역했다. 소노키는 안중근 사건 관련자들의 신문과 재판의 전 과정 을 통역했던 인물이다.

1939년 10월 15일 안준생은 총독부 관리들과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고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위령했다. 안준생은 이 자리 에서 '이토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고, 통역 소노키는 기자들에게 '안중근이 처형 직전에 자신의 행위가 오해에서 비롯된 폭거임 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안준생은 다음날인 16일, 서울 조선호텔로 찾아가서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 1885~1951를 만났다. 이토 분키치는 도 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농상무성에서 관료로 입신해서 남작의 작위를 받고 일본광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이토 분키치는 안준생과의 사전 약속 없이 '우연히' 서울에 들른 것으 로 언론에 알려졌다. 안준생은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하러 왔다' 고 말했고, 이토 분키치는 '함께 지성으로 황도皇道를 보필할 것 이기에 개인적인 사죄는 필요없다'고 답했다. 안준생과 이토 분 키치는 17일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고 분향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로 이루어진 이 삼 일간의 '박문사 화해극'은 조선과 일본의 언론에 감격적인 필치로 크게 보도되 었다.

김구는 광복 직후 중경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났을 때 안준 생을 체포 구금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를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다. 안준생은 광복 후 조용히 한국으로 돌 아와서 6·25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란 가서 폐결핵에 걸렸다. 안 준생은 1952년에 부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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