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사 수업, 박양규 -3

2024. 10. 2. 15:46

p139~141

 

 (1) 아시리아 시대

 솔로문 사후,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왕국과 예루살렘을 중심을 하는 남왕국으로 갈라졌습니다 . 아시리아는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이 때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도 함락되어 파괴되었습니다. 아시리아 병사들이 사마리아 성전의 신상들을 약탈하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우상 숭배가 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의 왕 에살핫돈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제 혼합 정책을 펼쳤습니다. 피지배 민족들을 섞어서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면 결집해서 반란을 일으킬 일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 제국의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고, 또 다른 민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습니다. 그 결과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무렵인 주전 586년에는 이미 북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상당히 흐려졌습니다.

 

(2) 페르시아 시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뒤, 유대 땅은 사마리아 속주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들이 포로지에서 귀환하여 제2성전을 건립하려고 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속주가 이루어졌는데,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립하면 지역의 구심점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통해 제2성전을 건립하게 하셨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세웠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3) 알렉산드로스 시대

 페르시아 시대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할 떄 사라마리아 사람들은 세겜(그리심 산)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배경으로 예수께서 수가 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던 곳입니다. 예수께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셨을 때, 그 산이 그리심 산이었습니다. 아래의 기록은 알렉산드로스가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장면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혼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길래 자신들도 유대인들처럼 대우해 주기를 간청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은 히브리인들인데, 시돈인들이라고 불린다고 대답했다. 알렉산더는 또다시 그들이 유대인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자기들ㅇ른 유대인이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런 면세 특권을 준 것은 유대인들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돌아 올 때, 이 일에 대해 철저히 알아본 후에 내 생각에 옳은 대로 할 것이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1.8.6'

 

 여기서 보듯이 이미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는 구별된 사람들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북ㅇ스라엘 열 지파의 개념은 사라졌습니다. 도리어 시돈(페니키아)인들의 지배를 받던 이방인이었습니다.

 

(4) 마카비 시대

 셀레우코스 왕가가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 안티오코스 4새는 예루살렘에 헬레니즘을 강요합니다.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언급됩니다.

 

 1 그 후 얼마 안 되어 안티오쿠스 왕은 아테네의 원로 한 사람을 유다인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율법을 버리고 하느님의 율법을 따르는 생활 규범을 버리라고 강요하였다. 2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더럽히고 그 성전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에게 봉헌하게 하고 그리짐(그리심) 산의 성소는 그 지방 사람의 소원대로 나그네의 수호신인 제우스에게 봉헌하게 하였다 . 2마카 6:1-2, 공동번역

 

(5) 하스몬 시대

 주전 142년 마카비 가문의 시몬이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후 하스몬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전 134-104년에 왕위에 있었던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한 후 강제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요세푸스는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렉산더가 대제사장 야두아의 사외가 되는 마낫세를 위핸 군대 장관 산발랏을 시켜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본떠서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 주위에 살고 있었다. 히르카누스는 이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학, 유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조건으로 사마리아에서 살게 했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조상의 뼈가 묻힌 고향을 떠나가기 싫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았으며,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따랐다.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3.9.1

 

 이 부분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주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가 헬리니즘을 강요하자 저항했던 사람들이 반세기  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목적이라면 무엇이든 용납되는 것일까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9장에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사마리아 사람들이 불타기를 바랐던 제자들의 마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페니키아) 여인을 개처럼 취급하는 표현도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사라리아 사람들을 혐오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역사를 헤아려 본다면 신약 시대의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꼐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본질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