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무]/독립운동사 추천도서

안분도安芬道, 1905~1911 안분도는 안중근의 장남이다. 본명은 우생祐生이다. 안중근의 거사 후인 1909년 11월 7일 관동도독부 검사 미조부치는 하얼빈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다섯 살인 분도를 신문하고 청취서를 작성했다. 분도는 이때 어머니 김아려와 함께 하얼빈에 와 있었다.안중근은 아내 김아려와 어머니 조마리아 앞으로 작성한 유서에서 장남 분도가 자라면 천주교 신부가 되게 해달라고 당부했다.안중근 일가는 안중근의 거사 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 분도는 흑룡강성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이은李垠, 1897~1970 이은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이 상실되고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王世弟로 격하되었다. 이은은 1920년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 한국명 이방자와 결혼했다. 이은은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중장의 지위에 올랐다.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으나 심한 뇌혈전증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이은은 진과 구玖 두 아들을 두었으나 진은 어려서 죽고 구는 미국 여인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귀화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이토는 사후에 도쿄시 시나가와구 니시오이의 묘지에 묻혔다. 1932년에는 이토의 명복을 빌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찰 박문사博文寺가 서울 장충단공원 동쪽 언덕에 세워졌다.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순직한 무관들을 제사하는 자리였다.박문사 건립 운동은 조선총독부의 제창으로 시작되었고 조선과 일본에서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조선의 모금 목표는 이십만 엔이었고 이 액수는 각 도에 할당되었다. 조선 왕궁인 경희궁의 홍화문을 옮겨서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았다. 1973년에 박문사 부지는 삼성 재벌에 매각되었고, 이 자리에 1979년에 신라호텔이 건립되었다.1938년에는 메이지 헌법 공포 50주년을 기념해서 일본 국회의사당 중앙 광장에 이토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안중근의 거사 이후 팔십 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안중근의 행위를 역사 속에서 정당화하지 않았고 교리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1910년의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1993년 8월 21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였다. 김 추기경은 이날 미사의 강론에서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안중근의 행위..

홍범도와 함께 북만주의 밀산을 거쳐 러시아령으로 들어간 지청천은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1933년 그가 이끄는 한국 독립군(2천5백 명)은 중국의 길림구국군(2천 명)과 연합하여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군복 3천 벌, 군수품 2백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천5백 정, 담요 3백 장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맡아 광복이 될 때까지 항일전선에서 싸웠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귀국한 그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고 득표율(75.21퍼센트)로 서울 성동에서 당선했다. 1957년 급서한 그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잠들어 있다. 지청천과 요코하마 맹세를 함께 했던 삼총사의 ..

1919년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아 특무전단을 조직한 나카노 다스는 압록강과 두만강 양안에서 살인기계로 악명을 날렸다. 기병 중위 출신인 나카노는 1920년 7월 친일 마적단 특무 장강호와 함께 경성으로 와 조선호텔에서 총독부 경무국 야마구치 고등과장, 마루야마 참사관, 치바 경기도 경찰부장을 만나 '불령선인' 살육 계획을 협의했다.야먀구치 고동과장은 1 천 5 백원의 공작금을 주면서 불령선인을 포뱌 일본 관헌에게 넘기면 실로 재판 둥의 뒤처리가 귀찮고 곤란 하니 당신들이 죽결 처리하고 중거품과 인적사항만 가까이 있는 일 본 관헌에게 남겨라’라고 지시했다. 총독부에서 지시받은 대로 나카 노는 장강호와 함께 5 백여 명의 정예 마적들로 편성한 특무전단을 이끌고 홍범도 부대와 서로군정서 부대가 주둔한 안도현..

2대 조선주차군사령관과 2대 조선 총독을 지내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하세가와는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국제적 비난의 표적이 되어 일본으로 소환당한 뒤 재기하지 못했다.하세가와의 실패는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를 일본 육군의 신화로 만든 조슈군벌 전체의 패퇴를 불러왔다.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까지 조슈군벌이 독점해온 조선 총독 자리를 사츠마군벌이 장악한 해군에게 빼앗긴 것이 하세가와였다. 하세가와의 후임은 해군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로 두 차례에 걸쳐 최장기 조선 총독을 지내고 일본 총리가 되었다.하세가와는 1924년 도쿄에서 죽었지만 조슈군벌은 다시 일본 군부와 내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들이 ..

러일전쟁 당시 무려 3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한 최악의 돌격 작전을 감행해 끝내 여순항 점령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의 군신이 되었고, 이 작전의 선봉에 선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일본 육군의 신화로 만들었다. 메이지 일왕은 이 무모한 작전에서 노기 마레스케의 두 아들이 전사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왕세자 히로히토의 스승으로 초빙했다. 노기 마레스케는 3만 명의 병사를 잃은 자신을 신임해 준 메이지 일왕이 당뇨병으로 즉사, 그의 장례식이 열린 1912년 9월 13일 아내와 함께 할복자살했다. 조슈군본은 ‘무사가 지킬 충성의 모범’으로 치켜세우며 일본은 물론 서울의 남산에도 노기신사를 짓고 군신으로 우상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