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예레미야, IVP 읽고 [김근주] -4

2019. 12. 27. 17:58

p.86

 

 이 말씀에 비해 하나님의 거룩은 높이 기리면서 도무지 고아와 과부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찬양은 참으로 유감이다.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보호자로 나서신다. 바로 그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겠다고 하면서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야훼 하나님이 아닌 엉뚱한 신을 섬기는 것, 즉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제의에만 충실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종교 해위인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려는 사람은 결코 가난한 이웃을 무시하며 살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다면 그는 신앙은 좋되 이웃을 섬기는 삶이 약한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입술로 무엇이라 고백하든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는 다른 종교를 강하게 배격한다. 그러나 종교심을 고취시키는 '경건하고 엄숙한 예식'을 빙자하여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욕망을 부추기면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아보지 않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배격해야 할 '우상숭배'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제사에만 힘쓰는 백성을 향해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든다고 책망하신 말씀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그들 행동의 근본에 제물 욕망이 놓여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다시 얘기하지만 우상 숭배는 이방 신에게 절하고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우상숭배는 넘쳐 나는 종교적 행위에 치중하여 근본적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행위이며, 이들의 마음에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말씀의 근본적인 의미다.

 

정말 무서운 우상은 욕망의 총화로서의 '재물'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적은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진전이나 도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불교,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뉴에이지 운동이 아니다.

 

수천 년 전 이스라엘에게나 지금의 우리 교회에게나 가장 강력한 대적은 재물과 구체화된 우리의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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