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무]
p30-31 14세기를 풍미했던 화가 프란체스코 트라이니가 1341년에 그린 입니다. 이탈리아 피사에 있는 산타카테리나 성당 제단 뒤에 놓여 있는 이 그림의 상단 중앙에는 보시다시피 그리스도가 앉아 있습니다. 도상학자들에 따르면, 그 왼편에는 마태, 누가가 각자 자기가 쓴 복음서를, 바울도 역시 자기가 쓴 서신서를 들고 앉아 있고, 오른편에는 모세가 십계명 돌판 두 개를, 그리고 요한과 마가가 역시 그들이 쓴 복음서를 들고 앉아 있지요. 그 아래 단의 한가운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을 들고 앉아 있고, 그 왼편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을, 오른편에는 플라톤이 를 펴들고 서서 아퀴나스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하단 중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서구에 전한 이븐 루시드가 비스듬히 앉아 있고, 그 좌우에는 철..
p24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와 모로코 같은 변방을 떠돌아다니다가, 십자군 전쟁이 지속되던 12세기 중엽에서야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 같은 아랍 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서구에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라 일컫는 이 철학이 전해지자 당시 진보적 성격을 지녔던 나폴리 대학교와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속한 많은 젊은 시학자와 수도사들은 그것을 활용하여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p16 이 둘의 만남은 마치 하나님이 기독교를 위해 오랜전부터 준비하신 것처럼 보이지요. 왜냐하면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이론들을 그리스 철학이 플라톤주의라는 이름 아래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개발해 갈고닦아 왔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을 "예수가 탄생하기 400년이나 전에 존재한 그리스도인" 또는 " 그리스어로 저술한 모세"라고 칭송한 것이 바로 그래서입니다. p17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시급히 해겨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오늘날 우리가 삼위일체론이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즉 어떠게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이면서 또 하나일 수 있느냐를-누구보다도 외부 이교도들과 내부 이단들에게-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지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실로..
p62 그러나 지금 우리가 관심하는 질문은 '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주에 목적이 있는가?'임을 잊지 맙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변화나는 이 우주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치있는 상태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지, 만약 있다면 '가치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결정했다면 그 상태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지, 명확하고 분명하게 목표로 삼을 만한 가치인지를 또 물어야 할 것입니다.
p68 진화론이 전한 관점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시대에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세상이 끝날 거라 기대했고, 자연 질서를 초월한 신의 개입으로 신의 목적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외에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수 천 년, 심지어 수백만 년을 관통하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신의 나라를 진화의 최종 목표인 사랑과 지식, 창조적 협력, 우정이 성장해 성취된 사회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학 이전에 그려진 인류의 그림이 더는 적절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류가 몇 천 년 전에 에덴동산에서 완벽하게 창조되었고, 갑자기 죄에 빠졌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악한 세상이 급작스럽게 종말을 맞는 그림말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자연 과정..
p111 홀의 말을 빌리자면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무의미에서 구원하시는 공동체로써 존재한다. 교회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상기시켜 주는 공동체다. 또 교회는 그분이 주신 고귀한 소명으로부터 도다망치려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명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각자가 지닌 능력에 걸맞게 삶의 목적을 향하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이 이러한 활동을 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직면하지 않고 생명에서 돌아선 현장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경험에서부터 생명으로 돌아서도록 지지해주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우리의 두려움을 내려놓는 곳, 우리의 굳어버린 마음을 여는 곳, 고립에서 벗어나는 곳, 꿈을 잃은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곳, 그리하..
p86-87 참회는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참회는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자리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돕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무말할 것 없이 이러한 선택 후 변화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이 때문에 우리는 참회보다 후회를 선호한다.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다른 행동을 하기보다는 "미안해, 미안해, 내가 한 일은 정말 끔찍한 일이야"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 머무르는 일이 훨씬 편하다. 언젠가 한 현명한 상담가는 내게 만성적인 죄책감은 실제적인 변화를 꾀하는 대신 치르는 대가라 말해 준 적이 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히 잘못했다고 느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그래서 행동을 바꾸지는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