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017. 12. 21. 17:25

목차


1. 요한계시록 들어가지 전

2.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시대의 모습은?

3.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4. 정경화란?

5.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1. 요한계시록 들어가기 전


 오늘날 요한 계시록의 다른 성경에 비해 연구나 설교가 미진한 원인은?


-> 칼빈이 주석책을 쓰지 않은 유일한 성경이 요한계시록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중세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을 우민화 하는데 사용함. 그들 가운데 쯔빙글리나 루터 등은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이러한 의구심의 뿌리는 초대 교회에 일어났던 정경화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1) 콘스탄틴 대제 때까지 유력한 교회 지도자(유새비우스, 갑바도기아 교부인 가이우스)에 의해 정경성에 의문이 제기 

(2) 주후 2세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음(초기 교부들이 사용하지 않음

(3) 요한계시록이 분파적 광신주의(몬타니스트, 천년왕국 분파)을 조장했다고 판단함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에게도 영향의 미침


(1) 초대 교회와 종교 개혁자들에 신학적 논의가 부족하게 됨

(2) 요한계시록은 여러가지 신비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데 늘 이단적 분파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움


그래서 한국 교회 안에서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보다는 이단과 동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무미건조한 해석들에 안주함.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이해는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음


2.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시대의 모습은


(1)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 : 95-96년경, 도미티아누스(도미티안) Domitian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네로 황제에 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을 굉장히 박해 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부활한 네로'라고 불릴 정도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떄에 특히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일로 많은 박해를 당했다.


(2) 요한계시록의 주제 : 요한복음 16:33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떄의 박해는 가장 극심할 때가 아니였다.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는 2번 째였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기독교를 인정할 때까지 8번의 대박해가 더 있었다.

서머나 교회에게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것은 "지금도 고난이 많지만, 더 많은 고난이 있게 될지라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박해하면 기독교가 사라지고, 교회는 존재하지 않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더욱 기독교가 되게 했고, 교회를 굳건하게 했따.


※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았이다." : 카르타고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 Terullian


3.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로마시대에 이 곳 밧모섬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의 암살 이후 다시 풀려나 에베서로 가게 된다.

이 곳에 있는 동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게시를 받아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그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4. 정경화란


(1) 구약의 정경화 과정


구약은 일찍부터 두 언어로 전승되어 왔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이다. 다른 하나는 기원전 3세기 부터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그리스어역 구약, 칠십인역이다(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나온 70 또는 72명의 번역자가 번역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 번역자들이 100년 이상 걸려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이후 이스라엘 본토를 떠나 그리스 문화권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들이 '디아시포라'라고 부른다)을 위해 쓰여진 성경이다.


그런데 이 칠십인역에는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는 없는 몇권의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대교에서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후'암니아'라는 지방에 있던 예쉬바라고 불리는 유대인 랍비들의 아카데미에서 구약성경의정경을 결정하는 문제가 논의 되었다.


'요한난 벤 자카이'라는 랍지가 주도한 이 아카데미는 어떤 책들을 '거룩한 책'에 포함시킬 것인가로 의논한 끝에 히브리어로 쓰여진 39권의 책만을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공식 선포하였고, 이후 유대인들은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편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서 구약성경 보다는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는데, 거기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에는 없는 소위 외경이라고 하는 책들이 더 편집되어 있었고 그것이 그대로 카톨릭의 경전이 되었다.

카톨릭에서는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 그리스어 외경을 히브리어 성경에 들어있는 39권 책과 돌일하게 영감 받은 권위 있는 제 2의 경전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다가 끝낸 경전에는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제 2경전(외경)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또 편집 형태에 따라 책의 권수도 일정하지 않다. 1977년에 나온 우리나라의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에 보면 제 2경전은 토비트, 유딧, 에스텔,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이상 9권이다.


(2) 신약의 정경화 과정


신약 성경의 정경화는 신상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문서로 기록된 권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구약성서를 그들의 성서로 받아들였다. 이는 예수의 사역을 해석할 때 구약성서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예수가 유대교 성서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성취한 것으로 이해 하였다.


2세기에 유스티누스는 사복음서들이 유대교 성서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했다. 비슷한 시기의 프랑스 리옹의 감독이었던 이레네우스는 사복음서 뿐만 아니라 바울의 서신들, 베드로전서와 요한일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비록 약간 축약된 목록이지만 우리가 '신약성서'롤 알고 있는 성서의 수집록이 오리게네스(186-251)로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4세기 초 가이사라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신약성경을 구성하는 저작'은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들, 요한일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자신이 확정한 22권의 승인된 책들 외에 논의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5권(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책들도 목록에 추가하였다.


현재의 신약성서 28권의 목록이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367년이 되어서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367년에 쓴<그의 부활적 기년 서신에서 우리의 27권의 책들을 '구원의 근원들'로 제시하고 있으며 '정경'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시기에 기독교 정경의 개념이 충분히 정착 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후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교회에서 거룩한 성경으로 읽혀져야 한다"는 정경의 원리를 명시하며 신약 27권의 목록을 확인하였고, 종교 개혁자들이 제기한 정경 문제에 대해 1546년에 트렌트 공의회에서 27권의 정경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신약 정경의 형성은 기독교 공동체의 처음 300년 동안 회람되던 많은 문서들 가운데 선택되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에 의해 정경으로 읽혀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 가운데서 생겨났다는 점이다. 공동체는 그 책들을 사용하면서 다른 것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기독교 신앙을 일으키고 풍성하게 바로잡는 데서 그 책들이 드러낸 능력을 존중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약 정경은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이나 회의에 의해 위로부터 부과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채가 형성되는 수세기 동안 그 공동체의 전체적인 경험과 이해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읽어햐 하는 이유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산다. 특히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시대는 빠른 문명의 발전으로 불치병의 치료, 지구촌이 하나가 될 것이라는 이상적인 희망을 갖기도 하지만 무섭도록 빠르게 발전하는 인간 문명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고 그 속도를 조절 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주체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주체가 인간이 아닌 사악한 과학주의, 기술주의, 경제주의 라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물질과 과학, 자본이 최고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품위는 얼마든지 손상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경제주의는 하나님의 권위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걸림돌로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경제주의가 인간 문명을 좌지우지 하게 될 때, 인류의 운명은 미중유 상태로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교회는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둘러싸여 사면 초가에 놓였던 초대 교외와 같은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습이다.


교회는 이러한 사태를 대비하고 극복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미 요한계시록은 로마라는 제국에 의해 소아시아의 일곱교회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단은 로마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또 다른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과학주의, 기술주의, 경제주의 이다. 오늘날 교회는 초대 교회와 동일하게 그러한 세력과 영적인 전투를 하도록 요구 받고 있다. 그러한 영적 전투의 방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공급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그렇다고 요한계시록을 손자병법처럼 전술 전력울 다룬 책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궁국적인 성취, 그 성취의 배경에 있는 천상적 성전이 장엄한 환상, 성취로 말미암아 주어질 축복의 주인으로서의 교회의 현재와 미래 여기와 저기에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교회를 강한 군사로 무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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